베란다나 창고 깊숙한 곳에는 혹시 '언젠가'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물건들이 잠들어 있지 않나요? 먼지가 뽀얗게 내려앉은 통기타, 어느새 빨래 건조대가 되어버린 실내 자전거, 한 번 쓰고 박스째 넣어둔 유화 그리기 세트 같은 것들 말이죠.
볼 때마다 "아, 저거 해야 하는데..."라는 부채감과 스트레스를 주는 물건들. 버리자니 아깝고, 두자니 짐스러운 이 애물단지들을 저는 과감하게 비우기로 결심했습니다. 미니멀리즘을 공부하며 깨달은 사실은, 제가 그동안 붙잡고 있었던 건 그 물건 자체가 아니라 '그 취미를 멋지게 즐기는 나(Fantasy Self)'에 대한 환상이었다는 것입니다.
오늘은 그 환상을 걷어내고 현실의 쾌적한 공간을 되찾은 저의 치열했던 '취미 장비 처분기'를 아주 솔직하게 공유해 보려 합니다.
1. '언젠가'는 영원히 오지 않습니다: 판타지 셀프와의 이별
우리는 물건을 살 때 물건만 사는 게 아닙니다. 그 물건을 사용하는 '미래의 나'를 함께 삽니다. "이 실내 자전거를 사면 나는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 땀 흘리며 운동하는 건강한 사람이 될 거야." "이 기타를 사면 나는 주말마다 창가에 앉아 연주하는 감성적인 사람이 될 거야."
하지만 냉정하게 현실을 직시해 봅시다. 물건을 산다고 해서 사람의 본성이 변하지는 않더군요. 운동을 싫어하던 제가 기구가 생겼다고 갑자기 운동광이 되지는 않았습니다. 지난 1년 동안(사계절이 바뀌는 동안) 그 물건을 단 한 번도 진지하게 사용하지 않았다면, 앞으로도 사용할 확률은 0%에 수렴합니다.
저는 인정하기로 했습니다. "나는 집 안에서 답답하게 자전거를 타는 것보다, 차가운 공기를 마시며 밖에서 산책하는 걸 더 좋아하는 사람이다." 내 진짜 성향을 인정하고 '환상 속의 나'를 보내주는 것, 그것이 비움의 첫걸음이었습니다.
2. 경제적 관점: 물건값 vs 공간 비용 (월세 계산)
"이거 비싸게 주고 산 건데..." 비우기를 망설이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'돈'입니다. 경제학 용어로 '매몰 비용(Sunk Cost)'이라고 하죠. 이미 지불해서 되돌릴 수 없는 돈인데, 우리는 그 돈이 아까워서 현재의 손해를 감수합니다.
저는 독일의 비싼 월세를 기준으로 계산기를 두드려 보았습니다. 집 전체 평수 대비 그 덩치 큰 러닝머신과 자전거가 차지하고 있는 면적을 월세로 환산해 보니, 그 물건을 '보관'하는 데 드는 비용이 1년에 수십만 원이 넘더군요. 물건값은 이미 3년 전에 지불하고 끝났지만, 공간 비용은 지금 이 순간에도 매달 제 통장에서 빠져나가고 있었던 겁니다.
"죽은 물건을 모시는 창고 비용을 낼 것인가, 아니면 내가 쉴 수 있는 쾌적한 공간을 누릴 것인가?" 답은 명확했습니다.
3. 비우는 방법: 쓰레기가 아니라 '자원'으로 순환시키기
그냥 버리기엔 너무 멀쩡한 물건들이라 죄책감이 들었습니다. 그래서 저는 이 물건들이 진짜 필요한 주인을 찾아가도록 '순환'시키기로 했습니다.
① 중고 거래 (독일 Kleinanzeigen / 한국 당근마켓)
상태가 좋은 악기와 운동기구는 사진을 예쁘게 찍어 올렸습니다. 놀랍게도 올리자마자 연락이 왔습니다. 제 통기타를 사러 온 대학생의 반짝이는 눈빛을 잊을 수 없습니다. "정말 배우고 싶었어요!"라고 말하며 기타를 메고 가는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습니다.
"아, 물건은 내 구석방에 처박혀 썩어갈 때가 아니라, 누군가에게 쓰일 때 비로소 생명력을 갖는구나."
② 아름다운 기부
팔기 애매한 미술 도구들은 동네 커뮤니티 센터나 필요한 이웃에게 나눔 했습니다. 비움은 상실이 아니라 나눔의 기쁨이 될 수 있다는 걸 배웠습니다.
💡 취미 용품 비우기 체크리스트 (자가 진단)
- 1년의 법칙: 지난 1년간 한 번이라도 꺼내 썼는가? (NO → 비움)
- 대여 가능성: 가끔 필요하다면 렌탈샵이나 공유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는가? (YES → 비움)
- 즉시성: "지금 당장 할 건가?"라는 질문에 "아니, 나중에 시간 나면..."이라고 답했는가? (YES → 비움)
마치며: 물건을 비우고 햇살을 얻다
커다란 운동기구와 잡동사니를 비워낸 베란다 창가에는 이제 따스한 햇살이 가득 들어옵니다. 저는 그 자리에 작은 의자 하나를 두고 차를 마십니다. 죽어있던 창고가 저의 가장 소중한 '힐링 카페'로 변신한 것입니다.
과거의 실패한 취미를 붙들고 자책하지 마세요.
그 물건들을 비워낸 빈 공간에
지금의 나를 행복하게 하는 새로운 에너지를 채우시길 바랍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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